【모토야마슈쿠(本山宿) -もとやまじゅく-】 소재지: 시오지리시 소가모토야마
기소지(木曽路)의 입구, 마쓰모토 평야(松本平)의 출구로서 번성했습니다. 덧문이 달린 2층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지금도 당시의 모습이 짙게 남아 있으며, 소바키리(蕎麦切り) 발상지로 소개되었습니다.
게이초(慶長) 19년(1614년)에 시오지리(塩尻), 세바(洗馬), 모토야마(本山) 3개 슈쿠(宿)가 새로운 나카센도(中山道) 도로의 슈쿠(宿)로 결정되었지만, 시오지리슈쿠(塩尻宿)나 세바슈쿠(洗馬宿)처럼 이웃 마을에서 사람들을 이동시켜 만든 슈쿠(宿)가 아니라 중세부터 있던 취락이었습니다.
에도(江戸)에서 세어 32번째 슈쿠(宿)로, 세바슈쿠(洗馬宿)까지 30초, 니에카와슈쿠(贄川宿)까지 2리 거리에 있습니다.
슈쿠(宿)는 남쪽에서 가미마치(上町), 시타마치(下町)로 구분되며, 중앙에는 혼진(本陣), 와키혼진(脇本陣), 돈야바(問屋場)가 있었습니다. 슈쿠(宿) 남쪽에는 하치만구(八幡宮), 초큐지(長久寺), 조코지(常光寺)가 있고, 슈쿠(宿) 북쪽에는 스와 신사(諏訪神社), 나라이고(奈良井川) 강 건너편에는 이케오 신사(池生神社)가 모셔져 있었지만, 일부는 폐사되었습니다. 또한 모토야마(本山)는 오와리 번(尾張藩) 기소(木曽)와의 경계였기 때문에 슈쿠(宿) 남쪽에는 구치도메반쇼(口留番所)가 설치되어 여성 검문이나 재목 검문 등이 이루어졌습니다.
덴포(天保) 14년(1843년)에는 가구 수가 117채로 여관은 34채 있었으며, 슈쿠(宿)의 저택 구획은 세바슈쿠(洗馬宿)의 3칸 폭에 비해 4~5칸 집이 많이 보입니다.
여러 번의 큰 화재를 겪었지만,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의 건축으로, 길을 향해 히라이리 데게타즈쿠리(平入り出桁造り), 센본고시(千本格子)의 2층 방 등 슈쿠바(宿場) 시대의 모습이 잘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메이지(明治) 이후 전후에 지어진 아키야마 가(秋山家)(와카마쓰야(若松屋)), 다나카 가(田中家)(이케다 가(池田家)), 고바야시 가(小林家)(가와구치 가(川口家)) 3채의 주택은 국가 등록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혼진(本陣)・고바야시 가(小林家)는 분큐(文久) 원년(1861년)에 닌코 천황(仁孝天皇)의 황녀 가즈노미야(和宮)가 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에게 시집갈 때와 메이지(明治) 13년 메이지 텐노(明治天皇) 어순행 때 숙박 장소가 되었습니다.
각 집에는 야고(屋号)가 붙어 있어 당시를 회상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명물은 '소바'로, 호에이(宝永) 3년(1706년)의 운령(雲鈴)의 수필 [풍속문선(風俗文選)]에 소바키리(そば切り) 발상지가 모토야마(本山)임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사적으로는 슈쿠(宿)의 동쪽 뒤편의 약간 높은 산에 기소 씨(木曽氏)의 일족・모토야마 민부(本山民部)가 지켰다는 모토야마 성터(本山城跡), 기우제・양잠・안병 치료의 영험이 있다고 여겨져 많은 에마(絵馬)가 봉납되어 있고, 사총이 시오지리시(塩尻市)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이케오 신사(池生神社)(이케노 곤겐(池の権現)), 도조신(道祖神)이나 경신탑(庚申塔) 문자비 등이 늘어선 시모마치 석조군(下町石造群) 등이 있습니다.
나카센도(中山道) 도로와 시내 5개 슈쿠바마치(宿場町)에 대한 기사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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